[청문어답]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힘든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나요
[청문어답] 매일 반복되는 지루하고 힘든 삶을 어떻게 견뎌내야 하나요
Q. 청춘이 묻다
저는 특별한 사연이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저를 위해주시는 부모님, 같이 고민을 나눌 수 있는 친구들, 먹고 살 만큼 괜찮은 직장도 있습니다. 빚도, 특별히 불행했던 유년시절 기억도 없는 저인데 왜 이렇게 사는게 힘이 들까요? 순간순간의 즐거운 기억도 있지만 이걸 위해서만 삶을 살아가기에는 모든 일이 버거워요. 삶을 살아가는게 마치 평생 등산도 달리기도 아닌 천국의 계단 위에서 살아가는 것 같아요. 영문도 모른 채 천국의 계단 위에서 잠시 멈출 수는 있지만 내려올 수 없는, 끝없이 올라가야 하지만 나는 항상 어느 이상 올라가지 못하는 기분이 들어요. 내일에 대한 기대나 올라가야할 이유도 없죠. 특별한 고민조차 없는 저는 힘들 자격이 없는데 왜 이렇게 지치는걸까요? 가끔은 저를 둘러싼 공기가 너무나도 무겁게 느껴져 버거운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아무렇지않게 삶을 살아갈까요? 저만 가벼운 삶의 무게조차 지탱할 수 없을만큼 나약한걸까요? 어떻게 이런 지루하고 힘든 삶에서 견뎌낼 힘을, 견뎌낼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요?
A. 어른이 답하다
삶의 무게를 알아차리는 순간
흔히 사람들이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지친다고들 하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이렇게 출퇴근하며 일해야 하는 걸까, 특별한 의미도 느끼기 어려운 이런 지루하고 힘든 일상을 영원히 견딘다고 생각하면 막막한 마음에 공황장애라도 올 것 같다, 그런 이야기들을 듣게 되죠. 그럴 때, 흔히 사람들은 “야, 맥주 한 잔 하고 나면 다 나아져.”라고 하며 술을 따라주거나, “한 대 피우러 가자.” 하면서 같이 으슥한 뒷골목으로 가기도 하죠. 아니면, “마음이 참 답답했는데, 집에 돌아와 웃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스르르 녹아내린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저도 언젠가부터 비슷한 상태가 된 것 같습니다. 삶이라는 게 ‘마냥’ 속 시원할 수는 없고, 어딘가 마음 한켠에 약간 무거운 돌덩이 하나 있는 듯한 느낌이죠.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면서는, 더욱이 삶이란 약간 무거운 게 ‘디폴트값’이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한 지도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것 같네요.
그 계기를 생각해보면, 결혼하며 자녀가 생긴 것도 있었던 것 같지만, 저에게 더 큰 계기는 더 이상 부모님께 의지할 수 없다, 라는 시점이 되면서였습니다. 아버지도 은퇴를 하고, 집안에 크고 작은 일들이 생기면서, 이 세상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내가 스스로 버티고 이겨내야만 한다는 걸 느끼면서였죠. 세상의 무게를 알게 되었달까요. 그리고 사실은, 그 세상의 무게를 부모님이 제 양옆에 서서 기둥처럼 어느 정도 떠받치고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살이라는 게 일종의 ‘맨몸’으로 부딪혀보니 이만저만 짊어져야 할 게 한둘이 아니더군요. 이십 대만 하더라도, 학교 앞 원룸을 계약할 때면 부모님이 올라와 같이 계약서를 읽어주거나, 하다못해 이모라도 와서 같이 계약서를 봐주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짊어진다는 건 그 모든 걸 하나하나 알아야 하는 문제더군요. 내 일상의 모든 것을 스스로 책임지려니,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인생이 이렇게 복잡한 것들이 많았나 싶었습니다.
실손보험부터 암보험까지, 예적금, 각종 공과금, 자동차나 살 집과 관련된 돈들, 미래를 위해 준비해야 할 연금은 기본 중에 기본이고, 앞으로 이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커리어 관리, 심지어 타인들의 경조사를 챙기는 일, 부모님의 노후에 대한 생각이나, 아이의 교육 등에 이르기까지 그 목록이 100개는 될 것 같더군요. 그때부터 조금씩 알게 됐습니다. 어릴 때는 이 모든 의무들을 누군가 짊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면제된 것뿐이었구나, 하고요.
20살이 되면서 저는 성인이 되었고, 이제 내 인생은 내가 온전히 책임지는 ‘어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진짜 어른이 되기 시작한 건 대략 30살쯤부터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 전까지는 저도 모르게 부모님의 그늘에서 반쯤 안심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나 부모님의 건강 악화라든지 은퇴 등 여러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막상 햇빛 아래 나와보니 웬걸, 그동안 나는 아직 꼬마였구나 싶은 생각도 해보게 되었습니다.
시지프와 반복되는 삶의 인식
저는 삶을 “천국의 계단 위에 살아가는 것 같아요.”라는 대목에서 솔직히 감탄했습니다. 왜냐하면 삶이란 바로 그런 것 같다는 생각이 정말로 들었기 때문이죠. 제가 곧바로 떠오른 건 ‘시지프 신화’였습니다. 시지프 신화에 대해서는 아마 다들 알고 있을 겁니다. 시지프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를 가둬버려 인간 세계에서 죽음을 없애버립니다. 이로 인해 세상이 큰 혼란에 빠지자, 신들을 기만한 죄로 그는 무거운 바위를 산 위로 영원히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죠. 하지만 바위는 언제나 다시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알베르 카뮈는 이 신화를 ‘인간 삶’을 가장 정확히 묘사한 것으로 봅니다. 우리 삶이란 시지프가 끝없이 바위를 산 위로 올리는 것과 닮았다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것을 저주하거나 그 때문에 절망하지 않고, 바로 그 ‘반복’을 ‘긍정’할 때 삶을 진정으로 살 수 있다고 봅니다.
카뮈는 우리가 시지프를 ‘행복한 사람’이라고 상상해야 한다고 봅니다. 바위가 다시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그는 매번 그 바위를 밀어 올립니다. 끝없는 반복 속에서도 저항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에서, 카뮈는 부조리한 세계에 맞서는 인간의 존엄과 위엄을 봅니다. 의미를 외부에서 찾기보다, 의미 없음 그 자체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자신의 태도와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부조리한 세계를 견디는 유일한 방식이라는 것이죠.
차이를 생성하는 삶
제 생각에는 아마도 거기가 ‘시작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삶이란 기본적으로 무거운 것이다, 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이죠. 만약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이 ‘무거움’을 어떻게든 없애려고만 애쓰게 됩니다. 매일 저녁마다 술을 마시거나 쇼츠와 릴스 중독에 빠지고, 잠깐의 해방감을 주는 쇼핑 중독, 보상심리적 여행 중독 같은 것에 빠져버립니다. ‘무거움을 떨쳐내는 상태만이 옳다.’라는 이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죠.
그렇기에 무거움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합니다. 삶을 먼저 똑바로 보지 못하면, 일종의 조건반사처럼 ‘무거움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이걸 없애버려야 하는데 어떡하지? 내 삶은 잘못됐어.’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온전히 판단하기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일단 무거움을 받아들이고 나면, 그다음을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여기에서 ‘차이’라는 개념을 갖고 오면 어떨까 싶습니다. 『차이와 반복』은 철학자 들뢰즈가 쓴 책의 제목이기도 한데요. “반복”의 무거움을 인정하고, 그다음에는 거기에 부여할 “차이”의 창조성을 고민한다, 정도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합니다. 반복이 인간 삶의 근본적 조건이라면, 그 사이에 부여하는 ‘차이가 있는 반복’으로 삶을 재구성해보는 것이죠.
다시 말해, 삶에서 반복은 없애버릴 수도 없고, 반복을 없애서 해결될 문제도 아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대신 삶에서 매일 ‘차이’를 만들어낼 고민을 해보는 것이죠. 오늘은 어제와 어떤 ‘차이’를 발생시킬 것인가? 여기에 마음을 쏟아보는 것이죠. 특히, 저는 단순히 소비하는 차이가 아니라 ‘생산하는 차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차이를 생산한다, 생성한다, 같은 관점을 가져보는 것이죠.
저에게는 글쓰기가 매일의 차이를 생성하는 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수험생활이라든지 직장생활에서도, 글쓰기를 지속하다 보니, 하루하루가 확실히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어제와 오늘은 같아 보이지만 다르더군요. 어제 한 생각과 오늘 한 생각이 다르고, 느낀 것이 다르고, 경험한 것이 다르다는 것을 점점 알아갔습니다.
특히, 육아도 그러한데, 보기에 따라서 육아야말로 끝없는 반복 노동 그 자체일 수 있습니다. 하루에 기저귀를 10번씩 갈고, 분유를 10번씩 먹이고, 아이를 재우고 하는 일을 하다 보면 공황장애가 올 것 같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매일 글을 쓰면 신기하게도 어제의 아이와 보낸 하루가 오늘 보낸 하루와 다르다는 걸 느끼게 되더군요. 어제 아이가 웃은 순간과 오늘 웃은 순간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말하자면, 글쓰기는 차이를 생성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미 있는 차이’를 ‘인식’하게 하는 힘이 담겨 있기도 했습니다.
만약 우리 삶이 시지프가 바위를 산 위로 올리는 것과 같다면, 우리는 그 속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어제 찾아온 사슴벌레와 다르게 오늘 찾아온 장수풍뎅이에 반가워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쇠똥구리를 보면서 나와 닮았다고 재밌어 할 하루도 있을지 모르죠. 아니면 매일 말 그대로 ‘차이’를 생성하며, 공을 다르게 굴리는 재미를 익힐지도 모릅니다. 매일 차이를 생성시키다 보면, 나중에는 물구나무 서서 공을 올리는 재미를 느낄지도 모르죠. 아니면 비가 오는 날에는 수영하는 기분을 느끼며 머리로 밀며 공을 올리고, 두 손은 헤엄치는 시늉을 하며 바다를 상상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차이를 생성하기’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지난달과 이번 달이, 작년과 올해가 달라질 수 있는 차이의 생성들을 찾아보면 좋겠습니다. 거기에 집중하며 나아갈 수 있다면, 삶에 조금은 다른 ‘기분’이 도래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 글쓴이 - 정지우
작가 겸 변호사. 사단법인 오늘은의 이사장이자 청년창작권리센터(YCRC)의 센터장이다. <청춘인문학>,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 <돈 말고 무엇을 갖고 있는가>, <사람을 남기는 사람>, <AI, 글쓰기, 저작권> 등 여러 권의 책을 썼다.
* [청문어답]은 청년들의 고민을 듣고 답하는 이야기를 담은 코너입니다. 청년이라면 아래 링크에서 누구나 '고민'을 신청할 수 있습니다.
청문어답 고민 등록 링크 ▶ https://forms.gle/CWeXJtKecqEiiym7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