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청년] 나약해질 수 있는 용기
나약해질 수 있는 용기
<이제는 진실 뿐이야 나라는 존재를 말해 줄 증거
나의 가장 깊은 심연 내 수치심의 문양들
나조차 알 수 없는 것들을 고치려 했어 싸우려 했어
머릿속은 뒤엉켰고 마음은 갈라졌어 왜 너희를 믿지 못했을까?
내 편이 되어 줄 거라고 산산이 부서진 나 돌이킬 수 없어
하지만 깨진 유리조각 그 안에 담긴 아름다움
상처는 나의 일부 어둠, 그리고 조화
거짓이 없는 나의 목소리는 이렇게 들리는 거였어
-<케이팝 데몬 헌터스>(넷플릭스, 2025) OST ‘What It Sounds Like'
‘청년’이라는 주제에 대해 글을 써야 한다는 것은 내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나는 ‘결혼 이후 도농 복합지역으로 이사해서 잘 적응해서 멋지게 내 삶을 살고 있다.’ 이런 식의 <고생 끝에 찾아온 행복>에 대해 쓰려고 했었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이곳도 사람 사는 곳이다 보니 어찌어찌 살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성공보다 실패가 더 익숙한 청년이다.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주변을 의식한 지나친 열등감 때문에 우울증을 진단받은 지 올해 십년이 넘었다. 한달에 한번 보건소 산하의 정신건강복지센터에서 모니터링 겸 상담을 받는다. 공황이 찾아오는 빈도수가 줄었으나 일이 줄어드니까 수입도 당연히 줄어들었다. 말일에 귀신같이 날아오는 각종 고지서를 보면 남편과 나는 푹푹 한숨이 나온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나만 이런 게 아니다.’라는 말을 몇 번이고 대뇌인다. 실제로 지역의 청년이룸카페에서 독거 어르신들을 위한 카네이션 봉사를 하러 갔을 때 이것을 실감했다. 각자 다양한 직업과 고민에 대해 시시콜콜 이야기를 나누면서 카네이션을 만들었다. 나도 모르게 최근 이 지역으로 이주한 멤버에게 밥은 어느 가게가 제일 맛있는지, 아플 때 어디로 가면 좋을지 등 개인적으로 터득한 ‘서바이벌 꿀팁’을 알려 주었다. 그러자 다른 분들도 자기가 아는 맛집과 소소한 생활 관련 팁을 그분에게 알려 주었다. 역시 우리는 이로운 것은 널리 알리는 민족 다웠다.
문득 나는 그 누구에게도 도와달라고 쉽게 말하지 못했던 20대가 생각났다. 나는 학교 상담센터 선생님의 상담을 받자는 권유를 무시했다. 스스로 나는 멀쩡하고 괜찮은 사람이라고 착각했었다. 결국 나는 학기 내내 밖을 나가지 않고 방 안에 틀어 박혀서 하루 종일 영화나 드라마를 몰아서 봤다. 어떤 날은 씻고 싶지도 않아서 모자와 후디를 뒤집어쓰고 편의점으로 나갔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도망가기 바빴다. 거울 속 퉁퉁 불어버린 내 모습이 흉측하고 보기 싫었다. 나의 사정을 교수님에게 설명할 때마다 눈물이 터져 나왔다. 결국 나는 우울증을 진단받고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천천히 한 걸음씩 이불 속 어둠에서 걸어 나올 수 있었다.
십년 전 그 당시에는 우울증이 누군가에게 쉽게 알릴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내가 용기를 내어 누군가에게 상처를 고백하니 또 다른 누군가가 자신의 상처를 나에게 고백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픔에 대한 호소를 누군가가 공감해준 순간이었다. 오히려 나의 나약함을 고백하는 것은 내 속의 지나친 자기연민과 자기혐오를 가라앉혀 주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분들 혹은 어린 친구들과 인간 대 인간으로 연결고리가 만들어진 기분이 들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정신의학과를 내원하고 상담치료가 대중화되었다. 여기저기서 ‘우리 친구 딸도 우울증이더라.’ ‘그 분도 공황장애가 왔었 단다.’ 라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다. 세상이 더 편리해지고, 엄청난 발전이 이루어졌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정신적, 심리적 고통을 호소하게 되었다. 정신의학과의 대기실은 시외버스 대합실처럼 항상 북적거린다. 항정신성약의 종류도 늘어났고. 매년 부작용이 더 적은 신약이 개발된다고 한다. 심리적 안정을 위한 셀프 케어 프로그램과 상담서비스도 많이 늘어났다. 코로나 이후 청년마음케어와 같이 정신적 질환을 가진 청년들에게 치료비나 상담료를 지원해주는 정책도 생겼다.
그러나 정신적, 심리적 질환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서 산업재해로 인정을 받는 것이 무척 어렵다.’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참아서 마음 한쪽에 상처가 곪아서 고름이 터진 기분이다. ‘’이인증에서 깨어나고 싶어서 엄지손가락을 손톱으로 살짝 찌르는 자해를 때때로 한다. ‘이걸 증명하기 위해 뇌나 마음을 꺼내어 보일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말로 정신의학과를 가야 할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여전히 사회의 많은 곳에서 한 구성원의 나약함은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으로 계산되기 때문이다. 조금만 재력이나 스펙이 모자라면 끊임없이 주변으로부터 비교당하고 더 살 맛이 나지 못하게 만든다. 벌써부터 ‘난 망했어 ‘라는 슬픈 말버릇을 반복하며 대뇌이던 초, 중학생 친구들도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사단법인 ‘오늘은’의 <청년 고립 실태 보고서> 너머에서 자신의 고립된 상태를 솔직히 인정한 친구들의 이야기에서 한 줄기의 희망을 보았다. 자기 자신의 깨어짐을 있는 그대로 노래했던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루미처럼 말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이 아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손을 잡고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들어줄 용기가 간절히 필요하다. 그 사람의 나약함은 희망을 위한 투쟁에서 비롯된 자랑스러운 상처이다. 그 사람에게 나의 나약함을 조용히 말해주며 응원해주고 싶다.
* 글쓴이 - 임연주(Instagram: @lyj9219)
INFP 91년 부산 사람. 영어강사 겸 작가다. 매일 춤추듯이 걸으며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린다. 대학에서 동아시아 정치와 문화를 공부했다. 우울증 때문에 힘든 20대를 겪었다. 하지만 본인의 삶과 주변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마음이 아픈 또래 청년들이 늘어나는 현상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지금의 청년들이 다음 세대에게 희망을 전달해 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고 믿는다. 남편과 2021년에 결혼하여 즐겁게 살고 있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은 엄마의 콩나물국과 남편이 끓여주는 라면이다.
- 이천시 도서관 제 4회 독후감 공모전 <쓰는 사람> 최우수상 수상(2025.5)
- 독립출판물 <겨롱겨롱_어느날 갑자기 겨롱을 결심하다>(2022, 이분의 일)
-브런치: https://brunch.co.kr/brunchbook/predixxxxscriptxxxx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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