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청년예술

청년의 이야기와 예술, 문화를 널리 전하며
새로운 청년 담론을 만들어가는
< 오늘은, 청년예술 > 입니다.

[오늘청년] 사물의 뒷모습

조재영
2025-08-26


햇빛이 찬란하게 빛나면서도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을 만큼 적당히 산뜻한 날씨. 그러니까 미움 하나 없이 여름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날이었다. 우리는 멤버 강준이 사준 아이스크림을 각자 하나씩 들고 올림픽 공원을 걸으며, 지금 이 순간이야말로 바로 ‘청춘’임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들 그렇게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강준이 불쑥 “와, 지금 되게 청춘 같은데요?”라고 내뱉자 왠지 모르게 모두 웃음보가 터졌다.


우리는 사단법인 ‘오늘은’에서 진행하는 문화예술 청년 지원 프로젝트인 아트퍼스트 시즌 3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같은 책을 읽고 감상을 나누면서 교양도 쌓고 관계도 지속하자는 취지에서 독서모임을 꾸렸다. 이른바 ‘현생’에 치여 한두 명씩 빠지더라도, 모임 자체는 오래도록 이어가자는 뜻에서 지은 이름, ‘길고 얇게 가는 독서모임’. 이름은 얇다지만, 사실 우리가 나누는 대화의 깊이는 절대 얕지 않다. 책에 적힌 문장을 거울삼아 각자의 내면을 비추고, 그 문장을 매개로 서로에게 건네는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이 소중한 순간들이 금세 휘발되어 버리는 것이 아쉬워, <오늘은, 청년예술>을 통해 그 청춘의 온기를 기록해 두려 한다.


24년 7월 선정 도서는 바로 안규철 작가의 『사물의 뒷모습』이었다. 『사물의 뒷모습』은 멤버 유리가 꼽은 인생 책으로, 유리는 우리가 이 책을 꼭 읽어보면 좋겠다며 직접 모두에게 선물해 주었다. 게다가 때마침 안규철 작가가 참여한 전시가 소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었다. 책을 함께 읽고, 그 책을 쓴 작가의 전시까지 함께 관람하다니—이보다 완벽한 세계관의 독서모임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런 소식을 전해 들은 사단법인 오늘은 측에서 전시 티켓 비용을 지원해 주었다.


결국 이날의 모임은 사실 아이스크림과 책, 그리고 전시 비용을 기꺼이 베푼 이들의 따뜻한 마음이 모여 성사된, 진정으로 값진 청춘이라 할 수 있다.




전시에서 눈길이 갔던 작품


소희: 안규철 작가님의 전시를 보면서, 글로만 보던 내용이 시각적으로 보여 훨씬 와닿고 좋았어요. 황인기 작가님의 작품도 서양화와 동양화의 특성을 접목한 발상이 신선하고 창의적으로 다가오더라고요.


이람: 저는 이배 작가님의 ‘붓질’이라는 작품을 보며, 겉보기엔 한 번의 붓질 같지만 사실은 여러 번의 붓질이 겹쳐 있다는 점이 흥미롭게 느껴졌어요. 작품 바로 옆에 인터뷰 영상도 시청할 수 있게 준비되어 있었잖아요. 작가님께서 인터뷰에서 계속 강조하시는 ‘꾸준함’과 ‘성실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 같았습니다.


유리: 한국 미술 작가들은 보통 큰 규모의 작품을 만드는데, 이러한 점이 외국인 관객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온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이 전시에서도 큰 규모의 작품을 여러 점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 또, 여태까지는 전시에서 보통 완성품들만 보다가 드로잉 단계에 있는 작품들을 보니 신선하더라고요. 사람에게 ‘창조성’이란 정말 중요한 가치구나, ‘창조성’은 다양한 의미를 가지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물일까?’라는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답변도 듣고 싶은데요. 저는 ‘커피’라고 답할 것 같아요. 각성 효과도 있고, 지친 마음을 위로해 주는 존재이기도 한 커피가 제가 지향하는 가치와 맞닿아 있기 때문이에요.


서윤: 저는 유근택 작가님의 ‘분수’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는데요. 솟구쳤다가 흩어지는 물줄기, 그 속에 비친 숲의 모습, 그리고 한지의 결이 살아 있어 생동감이 느껴졌습니다. 아버지께 드리는 드로잉 편지 앞에서는 한참을 머물렀어요. 면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그림으로 마음을 전달하려는 과정이 눈에 선명히 그려졌기 때문이에요. 자신이 본 아침 햇살과 거리의 풍경, 맨드라미꽃 등이 섬세하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보며, 작가가 아버지에게 얼마나 생생히 자신의 눈에 담긴 모든 것을 전달하고 싶었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무모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그림을 그리고 있다”라는 작가님의 말도 깊은 울림이 있었습니다.




책장을 넘기며 품은 생각


소희: 이번 책은 철학적이고 깊은 사유를 담고 있지만, 모든 부분에 공감할 수 있던 것은 아니었어요. 유리잔, 나사와 못에 대한 글(‘나사못’)은 쉽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지만, ‘스무 개의 단어’는 다소 추상적이고 어려웠습니다.


강준: 저는 책의 레이아웃과 폰트가 시각적으로 주는 독특함에 먼저 눈길이 가더라고요. 글의 내용 또한 성공과 실패를 바라보는 새로운 논리를 많이 제시했는데, 일정 부분은 사실 궤변처럼 느껴지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 안에는 삶을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녹아 있었고,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점이 아닐지 생각했습니다.


서윤: 저는 작가가 사물을 관찰하다가 시선을 점차 확장하는 방식이 인상 깊었어요. 작가의 시선은 작은 사물에서 출발하지만 결국 인생 전체를 직시하고 관찰하는 방향으로 확장하고, 그 과정을 읽는 독자인 제 시선은 결국 저 자신에게 향하게 되더라고요. 이 책 자체가 한 편의 전시회와도 같다,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특히 집에 남겨진 흔적을 ‘사소한 것들의 고고학’이라 표현한 부분은 크게 와닿았어요. 남이 남긴 흔적 속에서 과거를 상상하는 것, 실제로 한 번 해보고도 싶고 제가 남긴 흔적을 보고 누군가 상상한 제 과거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또, “간혹 무지개가 뜰지도 모르는 일이다”라는 작가의 말처럼, 반복되는 일상 속에도 새로운 빛이 스며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람: 저는 책의 문장 하나하나가 정말 아름답게 느껴져서 필사를 해야겠다고 다짐할 정도로 좋았어요. 작가님의 글에는 차분함과 끈기, 그리고 성실성과 같은 예술가적 면모가 잔뜩 묻어나 있는데요. 반대로 저는 성실하지 못하여 영감은 많지만, 늘 결과물을 내지는 못하거든요. 그런 저 자신을 자꾸 떠올리며 반성하게 됐습니다. 특히 “내 세계를 벗어나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라는 구절은 오래 곱씹게 되더라고요. 저는 살면서 제 세계를 벗어나는 경험을 몇 번 하긴 했지만, 그중 대부분은 제 선택으로 인한 결정은 아니었어요. 그렇기에 스스로 용기를 내어 내 세계를 넓히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금 깨달았고, 또 그럴 용기를 조금 얻기도 한 것 같습니다.


유리: 작가님이 예술가로서 자신의 소명을 끝없이 고민하는 모습이 책에 잘 담겨 있어 정말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기자 일도 하셨기 때문에 글솜씨도 워낙 뛰어나신 것 같아요. 사실 요즘은 책이 넘쳐나는 시대잖아요. 이 책은 그중에서 유독 빛나는 작품인 것 같아요. 글을 잘 쓴다는 건, 결국 자신만의 세계와 생각을 정확히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라는 점을 이 책을 통해 다시 느꼈습니다.




가면을 쓰지 않은 채로 사람을 만나는 것은 경솔한 일이 된다. 무엇이 되었든 손안에 남이 모르는 패를 많이 가져야 유리한 게임이 우리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한다. 이런 세상에서 예술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일이다. 부끄럽고 보잘것없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스스로 지는 게임을 자초해야 하기 때문이다. 타인에게 자기 내면의 온도를 전하는 것, 모르는 사람에게 따뜻한 손을 내미는 것. 그러기 위해 부도체가 아닌 특별한 그릇을 만드는 것. 그것이 예술가의 일이다.” (p. 158)


그날 우리의 대화는 단순히 책과 전시에 대한 감상에 그치지 않았다. 그보다 더욱 깊이 들어가 각자 인생을 바라보는 태도, 부풀려진 꿈, 허망한 반성까지 진솔하게 꺼내놓았다. 스스로 지는 게임을 자초하며,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서로에게 드러낸 그 순간만큼은 우리도 모두 예술가였고, 우리의 모임은 한 편의 전시회와도 같았다.


*다음번의 기록은 8월 선정 도서였던 『예루살렘의 아인히만』과 관련된 이야기다. 매우 어려웠던 책이라 모두가 참 난감했는데.... 어떻게 모임이 진행되었을지 궁금하다면 다음 글을 읽어주시길!


* 본문에 등장하는 이름은 전부 가명입니다.




* 글쓴이 - 조재영(필명: 윤서울)


어릴 때부터 글을 읽고 쓰는 걸 좋아했다. 언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바탕으로 현재 한영 통역을 공부하고 있다. 학사 전공은 심리학으로, 행복심리학 관련 글을 월간지에 기고한 경력이 있으며 그 밖에도 영화, 책 등 다양한 관심사에 대해 글을 꾸준히 집필하고 있다.


블로그: https://blog.naver.com/yoon-seoul

브런치: https://brunch.co.kr/@yoonseoul

이메일: jaeyoungcho@ewhain.net


* [오늘청년]은 청년들이 직접 청년 당사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 <오늘은, 청년예술>에서는 청년 담론에 참여하고자 하는 분들의 기고를 환영합니다. 기고를 희망하시는 분들은 chek68520@gmail.com으로 원고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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