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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청년] 고립 청년예술인, 새로운 관계망으로 나아가기

윤슬
2025-08-28

연극계에 뛰어든 지 12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청년예술인으로 살면서 극단이라든가 회사라든가 크고 안정된 조직에 소속되어 본 적이 없다. 공연 제작이든 영상 제작이든 프로젝트에 맞춰서 짧으면 한 달, 길면 1년씩 작업을 했다. 같은 프로젝트 팀과 새로운 작업을 하기 위해 기간을 연장한 적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매달 보장받는 임금과 보험 제도 같은 시스템은 내게 먼 일이다. 나는 꽤 오랫동안 일의 대가를 약속받고 노동력과 결과물을 제공하는데도 돈을 정확하게 노골적으로 요구하면 모욕적이고 의아한 시선을 받는 예술인이었다.


예술이 일이 될 수 있는가. 예술 활동이 일이 되어야 하는가. 예술 노동이라는 말이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예술 노동자라고 정의하면 더 이상 예술인이 아니게 될까 봐 두려웠다. 그러나 지금은 예술 활동 또한 특수한 노동이라고 생각하며 그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하나의 공연을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모으는 시간과 기획을 하고 극을 쓰고 회의를 하는 등 제작을 위한 준비 기간과 연습 기간을 모두 '시간'으로 정확하게 계산하기는 어렵지만 오랜 기간과 체력과 개인적 능력을 투자해야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는 코로나19로 겪은 고립 경험과 연극계가 아닌 다른 업계 사람들을 만나면서부터 시작됐다.


나는 팬데믹 기간에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라는 이유만으로 공연 전날 일방적으로 해고된 적이 있다. (검사 결과 음성이었다.) 약속된 임금도 받지 못했으며 계약서조차 없어서 연습 기간 동안의 시간과 노동을 누구에게서도 보상받을 수 없었다. 경력 한 줄로도 쓸 수 없게 된 건 물론이다. 나는 공연에 충분히 기여했지만 공연 당일에 마무리하지 못했단 이유 하나로 마치 없던 사실처럼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 사건은 내 마음에 까만 흉터를 남겼다. 적은 페이에도 꿈을 이루고 있다는 마음과 열정으로 20대부터 30대 내내 예술 활동을 해왔지만 이제 일을 일로 인정조차 받기 어렵다는 현실을 겪으니 버티고 버티던 마음마저 무너져버렸다. 그렇게 몇 년 간 연극을 쉬면서 이 일을 오랫동안 할 수 있을까 고민했다. 중장년층이 되어서도 예술인으로 혼자 사는 게 가능한 일일까. 불안과 걱정이 날 집어삼켰다. 집에서 혼자 생활하는 데 익숙해졌고 금방 사회로부터 단절되고 고립됐다. 직업이 곧 정체성이었던 나는 연극을 쉬면서 더 이상 내가 누구인지 모르게 되었다. 공허했고 외로웠으며 누구를 만나야 할지,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꽤 오랜 기간 병원과 상담을 오가고 이사를 하면서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즈음에서야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용기를 냈다. 일어서고 싶었고 나아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혼자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힘을 낼 수가 없었다.


출처 : 픽사베이


제일 먼저 만난 곳은 일터에서 우연히 접한 청년유니온이었다. 그들을 보고 프리랜서 모임과 독립노동에 대해 연구하고 활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나는 친한 연극인 청년들에게 물었다. 우리도 프리랜서냐고. 누구는 프리랜서가 맞다고 했고 누구는 프리랜서가 아니라고 했다. 나는 청년유니온 모임에 나가서 같은 질문을 했다. 예술인도 프리랜서냐고. 프리랜서에 대한 정의가 아직 온전히 내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혼자 일하면서 프리랜서라고 생각하면 프리랜서인 것이다. 마치 내가 예술인이라고 말하면 예술인인 것처럼.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예술 프리랜서로 정의하고 독립적인 프리랜서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연극인들과 만날 때처럼 처음엔 비슷한 자조와 한탄으로 모임이 시작돼서 실망하기도 했지만 주 1회씩 정기적으로 모임이 발전하자 관계망이 달라졌다. 점점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자기가 이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왜 시작했는지를 공유하기 시작했다. 업계도, 직종도, 관심사도 다른데 공감대와 동질감이 형성되었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단순한 위로보다는 서로의 일을 일로서 존중하고 지지하며 이해하는 마음과 연대였던 것이다.


이후로 만난 곳이 일하는 청년 여성을 위한 유료 커뮤니티 멤버십이었다. 슬랙이라는 플랫폼과 구글 공유 문서를 활용하는 활동을 통해 완전히 다른 직업 세계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매주 그들이 회고하는 일 얘기를 들으면서 각자가 운용하는 일의 방식과 직무의 다양성을 알게 됐다. 거기다 줌을 이용하는 온라인 글쓰기 유료 멤버십 모임에도 가입하면서 아예 다른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과 글까지 접하게 되었다. 연극을 중심으로, 취미를 중심으로 비슷한 사람만 만나던 나의 알고리즘적 관계망이 느슨하고 넓은 관계망으로 바뀌었다. 해방감을 느꼈다. 고립감과 함께 좁아지던 터널 시야와 관계 실조에서 벗어나는 감각을 느꼈기 때문이다.


관계 실조란 영양소가 불균형해진 영양실조처럼 "정작 필요로 하는 의미 있는 관계는 결핍된" (2024 청년세대 관계실조 보고서 - ISSUE1 알고리즘 현상, 2024.06.12) 불균형한 관계 상황을 말한다. 골고루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영양제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듯이 나도 나와 다른 취향과 다른 고민, 다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관계 맺기에 직접 찾아 나선 결과 보다 더 다채로운 세계를 인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관계 맺은 사람들은 각자가 경험한 것을 나름대로 의미화하는 사람들이었다. 의미화하는 방식도 플랫폼만큼 사람의 수만큼 다양했다. 거기서 또 배움을 얻었다. 그래서 이제 오랜 시간 겪은 고립, 새로운 관계 맺기 방식 같은 경험을 나도 의미화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글을 쓴다.




* 글쓴이 - 윤슬


책과 예술을 사랑하는 연극인이자 프리랜서 작가. 경계에 서 있거나 경계를 넘나드는 것에 관심이 많다.

instagram @suriparis_yoon @artsalon_rendezvous



* [오늘청년]은 청년들이 직접 청년 당사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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