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청년] '쉬었음' 청년을 만나다
'쉬었음 청년' 이란?
지난 주까지, 나는 '쉬었음 청년'이라는 용어가 있는지도 몰랐다. 중학교 시절부터 친하게 지내다가 성인이 되면서 연락이 끊긴 친구가 있었는데, 내가 곧 결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그 친구가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그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요새 어떤 일을 하고 지내는지 이야기를 했다. 그는 여러가지 일을 하다가 지금은 퇴사한 지 좀 됐다며, 자신을 '쉬었음 청년'이라고 칭했다. 일을 쉬고 있는 건 알겠는데, 왜 '쉬었음 청년'이라는 단어를 썼을까 싶었다. '쉬다'라는 동사를 굳이 명사로 바꿔서 누군가를 수식하는 형태로 쓰인 그 단어는 어쩐지 이상하게 다가왔다. 일을 쉬고 있는 상태를 한 인간의 정체성으로 박제해버리는 느낌이었달까.
'쉬었음 청년'은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에서 15~34세 청년 비경제활동인구 중 "쉬었음"으로 분류되는 사람들을 뜻한다. 즉, 일할 능력은 있지만 육아, 학업, 가사, 질병 등 다른 뚜렷한 이유 없이 단순히 '쉬고 있음'이라고 응답한 청년층을 의미한다. 쉬고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졸업 후 취업이 너무 안되어서 구직 활동을 단념하기도 하고, 직장을 다니다가 번아웃이 와서 퇴사를 하고 공백기를 갖기도 한다. 뚜렷한 이유 없이 취업을 기피하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있고, 경쟁과 성과를 중시하는 삶의 방식에 편입되지 않고 싶어서 취업을 거부하는 경우도 있다.
쉬게 된 사연
친구의 경우 '쉬었음 청년'이 된 이유는 복합적이었다. 이 친구는 사실 쉬어본 적이 없었다. 관심사가 넓고 아이디어도 많아서 자신이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소규모의 다양한 사업을 시도해보길 좋아했다. 그러나 이것저것 시도해보면 꼭 사업을 어렵게 만드는 사건들이 터졌다. 세계 경제건, 팬데믹이건, 가족 문제건 간에 말이다. 가족들은 친구가 해보고자 하는 일들을 지원해주지 않았다. 엄한 아버지는 친구가 시도하는 일들을 쓸데없는 짓거리로 치부하고, 빨리 취업이나 하라고 친구를 압박했다. 편찮으신 조부모님들과 오래 산 강아지에 대한 돌봄도 담당해야 했다. 지인의 소개로 한 회사에 데이터 엔지니어로 입사하긴 했다. 그러나 친구는 처음 약속과는 다른 직무를 맡게 되었다.
고객사의 클레임을 응대하면서, 동시에 직접 프로그래밍을 하며 문제사항을 해결해야 했다. 회사 문화는 보수적이고 억압적이어서, 친구가 일을 더 잘 해보려고 절차를 바꾸거나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보자고 제안하면 '쓸데없이 나서지 말고 네 역할이나 해라'며 덮어버렸다. 입사와 동시에 조부모님들의 건강도 악화되었다. 인천에서 서울까지 왕복 5시간을 통근하던 친구는 퇴근 후 잠들 때까지 내내 조부모님을 간병해야 했다. 친구는 회사와 연봉협상을 진행했는데, 회사를 소개해준 지인에게 자신의 희망연봉을 털어놓았다. 지인은 자기도 그렇게 못받는데 그 정도를 부르면 자기가 뭐가 되냐고 화를 냈다. 그 순간, 인간관계에 대한 깊은 회의가 밀려왔다고 한다.
조부모님들의 장례를 연달아 치르고 나서, 친구는 다니던 회사에서 자신의 미래를 찾을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사람도 만나기 싫어지고, 가족들로부터 독립하고 싶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서울로 이사를 하자마자 키우던 강아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친구의 표현으로는 그 후 1년동안 숨만 쉬며 살았다고 한다. 자신이 강아지를 버리고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완전히 꺾여버린 것 같았다.
누구도 듣지 않으려 하는 이야기
친구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한 가지 생각이 들었다. '쉬었음 청년'과 쉬지 않는 청년을 가르는 건 운명의 여신이 자아내는 섬세한 손놀림 사이의, 오직 단 한번의 작은 어긋남이라는 것을. 내가 누군가를 돌보느라 하루 종일 시간을 쏟아야 했다면, 지금의 직장에서 지금의 위치에 설 수 있었을까? 반대로 만약 그 친구가 자신의 커리어를 이끌어줄 모범적인 선배나 친구를 만났다면 어땠을까? 모르는 일이다. 한편으로 친구가 끈기나 독기가 부족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가족의 반대나 사업을 어렵게 만드는 상황을 맞닥뜨려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일을 이어나가 가시적인 성과를 만들어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하는 일마다 무엇이든 반대하고, 취업해서 편안하게 사는 삶이 유일하게 가치있는 삶이라고 말하는 가족의 밑에서 그런 마음근력을 기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통계청 경제활동 인구조사에서 '쉬었음 청년'의 숫자는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언론은 '쉬었음 청년'으로 인한 경제적 비용이 5년간 53조원이라니, 대한민국이 시들어간다니 하며 자극적인 보도를 쏟아내고 있다. 이 때문일까, '쉬었음 청년'들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높다. 조금만 힘들어도 관두어버리고 무너져버리는 존재들, 쓸데없이 눈만 높아서 현실을 모르는 존재들이라고 폄하하기 일쑤다. 그러한 비난은 정당하지 않으며, 정확하지도 않다. 이미 여러 기관에서 '쉬었음 청년'이 증가하는 원인을 밝혀냈다. '쉬었음 청년'들은 기업들이 경력직을 선호하는 구직 환경에서, 신입으로 입사하려 해도 최소한의 근무 여건이 보장되는 직장을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눈을 아예 낮춰서 오직 취업을 목표로 아무 곳이나 입사한다 한들, 상사의 폭언과 업무를 할 수 없는 환경을 버티며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릴 각오를 해야 했던 사람들이다. 오직 꺾여본 적 없는 사람들만이 꺾임을 비난한다. 꺾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운과 환경이 좋은 사람들 말이다.
사단법인 '오늘은'이 '열고닫기'와 공동으로 발간한 <2025 쉬었음 청년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조사 대상의 92.2%는 조건만 갖춰진다면 다시 일할 의향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 조건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바로 '나를 판단하지 않는 사회 분위기'였다. '쉬었음 청년'에게도 노동과 사회 진입은 중요하고 가치있는 문제이나, 사회는 이를 무시하고 비난하기만 한다. 한 개인이 쉼을 선택한 이유와 맥락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채로, '쉬었음 청년'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를 비난할 구실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결국, 우리를 구하는 것은 연결
친구는 왜 나에게 연락을 한 것일까? 물론 결혼 즈음해서 오래된 지인에게 연락이 오는 일이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2025 쉬었음 청년 연구보고서>를 읽고 나니 약간 짐작가는 바가 있었다. '쉬었음 청년'들은 사회적 연결감이 높을수록 행복감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었다. 취업을 위한 여건이 딱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관계맺기는 '쉬었음 청년'이 가장 능동적으로 해볼 수 있는 일이다. 나는 그 만남이 그렇게 즐거울 줄은 미처 몰랐다. 관심사도 잘 맞았고, 다른 중학교 친구들의 근황도 들으며, 속깊은 이야기들도 털어놓았다.
친구는 요새 창업에 관련된 국비지원 온라인 교육을 듣고 있다고 했다. 예전에 사업들을 너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한게 아닐까 싶어, 뭔가 배울 것을 찾아 교육을 신청했다고 한다. 친구의 새 출발을 있는 힘껏 응원하고 왔다. 그가 나를 만났던 순간만큼은 스스로를 '사회적으로 단절되어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느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글쓴이 - 정규진(instagram @q_uziii)
세상을 두려워만 했던 소년이, 사랑을 만나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떴다. 공포가 아닌 사랑에 기반해 행동하는 일이야말로 엔트로피에 저항하는 생명의 본성임을 깨달았다. 좋아하는 게 워낙 많아서 음악, 영화, 예술, 영성, 철학, 과학, 운동, 경제를 약간씩 집어먹고 있으나 어느 것 하나 잘 하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나무오르기, 굴파기, 날아다니기를 할 수 있지만 전부 잘 하지는 못하는 하늘다람쥐를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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