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청년] 쉬는 게 잘못인가요
딱 1년 전, 결혼식을 한 달 앞두고 희망퇴직을 했다. 뉴스에서나 볼 법한 단어가 막상 내 현실 세계에 떨어지니 막막한 마음이 앞섰다. 희망퇴직은 직원들에게 퇴직 의사를 묻고 희망하는 사람만 내보낼 수 있는 제도다. 위로금 명목의 4개월 치 월급에 실업급여를 7개월 정도 받을 수 있었다. 퇴사할까 말까 속으로 고민하던 차이기도 해서, 이참에 나가는 게 낫겠다 싶었다.
결혼식 준비 막바지로 정신이 없기도 했고,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나서 얼마간은 이런 여유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회사가 맞춰놓은 시계에 따라 살 필요 없이 온전히 내게 주어진 시간을 마음껏 쓰면 그만이었다. 2개월 동안은 마음의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다 3개월 정도 넘어서니 슬슬 조급해졌다. 그나마 관심 있는 회사의 채용 공고가 뜨면 서류를 넣어봤지만, 하나 둘 떨어지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아침에 일어나 느지막이 식사하면서 그날의 뉴스 기사를 보는데 눈에 띄는 제목이 하나 있었다. '그냥 쉬는 청년 역대 최대'.

쉬었음 역대 최대 관련 기사 웹 검색 화면
“어? 내 얘기잖아?”
반은 자발적이고 반은 강제적인 나의 ‘쉬었음 라이프’가 나쁘지 않았지만, 어쩐지 기사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마치 쉬는 게 잘못된 것처럼, 게으르고 구직의 의지가 없는 청년인 것처럼 프레임을 만들고 가두는 것만 같았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서 속으로 반발심만 들었다.
<2025 쉬었음 청년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쉬었음은 잠시 일시 정지 상태일뿐 포기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또 있었다니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불안은 불쑥불쑥 찾아왔다. 특히 집에서 책이나 유튜브를 보다가 시간을 쓴 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시간을 보낸 날 유독 불안이 심해졌다. SNS에는 퇴사하고 싶다는 푸념도 보이지만 돈벌이하지 않는 나보다 수입이 있는 그 사람이 더 나아 보였다. 혼자서 일거리를 만들고 해나가는 프리랜서를 보며 나를 부끄럽게 여겼다.
불안을 넘어 행복으로
고맙게도 배우자는 “이제 돈을 벌러 나가야 하지 않겠냐?”는 말을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다. 오히려 쉬는 나를 부러워했다. 평생 쉴 것도 아니고,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상황도 아니니까,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방향을 잡아보라는데 그럴 때마다 미안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도 억지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고 싶진 않았다. 이럴 땐 그저 시간을 가지는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움직일 때까지 기다려주는 거다.

신혼여행 뉴스레터 표지 이미지
엄밀히 따지고 보면 순수하게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돈 버는 일과는 거리가 멀어도, 진짜 해보고 싶었던 분야에 도전하면서 시간을 채워나갔다. 신혼여행을 2주 다녀온 게 너무 아까워서 뉴스레터를 보내기 시작했다. 개인 인스타그램으로 구독 신청을 받고, 신혼여행에서 느꼈던 소회와 그곳에서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에세이를 한 편씩 써서 구독자들에게 열네 번의 메일을 보냈다. “글이 재밌다, 호주에 가고 싶다!” 등 구독자의 피드백을 받을 때마다 얼마나 짜릿했는지 모른다.
관심 있던 숲해설가 교육과정도 들었다. 약 4개월 동안 170시간을 수료했다. 숲해설가가 되어서 직업을 바꾸겠다는 마음보다는, 나무와 숲을 주제로 공부하고 싶었던 마음이 훨씬 앞섰다. 주 2회 3시간씩 강의를 듣고, 주말 하루는 숲으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필기시험에 실습까지 준비하려니 자연스럽게 구직 활동은 뒷전이었다.

식물의 생김새를 관찰하는 안온
행복했다. 모르던 분야를 알아가는 재미와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동시에 직장 생활과 병행하기엔 너무 팍팍한 커리큘럼이라 쉬면서 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 확신하며 죄책감이 옅어졌다.
부모님 연배의 동료 교육생들은 하나같이 이렇게 얘기했다. "돈 벌 수 있을 때 바짝 벌어놔요. 안 그러면 나중에 후회해요." 어느 정도 세월을 통과한 분들의 말인지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어쩐지 청년은 계속해서 돈을 벌고 노후를 대비하고 달려야 하는 세대로만 보이는 것 같아서 씁쓸했다.
돈벌이보다 호기심벌이
내게 쉬었음의 시간은 자신을 실험해 본 시간과도 같았다. 어떤 경제적 역할이나 책임을 넘어서서 나를 탐색하고 나름의 방식대로 시간을 보내도 괜찮다는 걸 증명했다. 돈벌이가 아닌 호기심벌이로 시간을 보낼 수도 있구나. 조급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서 잠시나마 벗어났고, 통장의 잔액 역시 내가 아껴 쓰면 그리 부족하지 않은 금액이라는 것도 환기하는 기회였다.
쉬었음 연구보고서에서 쉬었음 청년 10명 중 3명은 행복하게 쉬고 있다고 응답했다. 쉬었음 상태에 행복함을 느끼는 이유로는 '휴식을 통해 몸이 회복'되고 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돌아볼 여유가 생겼다'가 응답의 1,2위를 차지했다. ‘관심 분야를 배우거나 시도해 보고 있다’의 응답이 3위로 뒤를 이었는데, 나는 세 가지 응답에 모두 해당하는 사람이었다.
사회적 잣대로 나를 돌아보면 불안 가득한 백수 청년이겠지만, 행복의 기준으로 보면 만족도 높은 시간을 꾸린 청년이었다. 마음속으로는 쉴 때라고 느꼈으나, 막연한 불안감에 사로잡혀 이를 무시하고 있다면, 내면의 신호를 알아차리고 그대로 바라봐주면 좋겠다. 생각보다 나는 쉬면서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라고, 호기심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 번만 더 믿어주면 좋겠다.
* 글쓴이 - 안온
평일에는 콘텐츠를 만드는 직장인으로, 주말에는 숲의 의미와 재미를 나누는 사람으로 지낸다.
인스타그램 @_onigra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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