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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청년] 또 다른 내가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

다솜
2025-11-28

또 다른 내가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


※이 글에는 <미지의 서울>,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아, 또 다른 내가 나타나 대신 출근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세상의 힘든 일들을 그 또 다른 내가 모두 겪어내 주고, 그동안 나는 침대에 누워 영상도 보고 책도 보고 쉬어갈 수 있다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한 번쯤 이런 상상을 한다. 또 다른 내가 나를 구해줬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상상


*미지의 서울 공식 포스터 / tvN 미지의 서울 공식 홈페이지


 여기 그 상상을 직접적으로 풀어낸 드라마가 있다. 박보영 주연의 드라마 <미지의 서울>이다. 엄마도 구분하지 못하는 일란성 쌍둥이 미지와 미래는 어릴 때부터 둘만 아는 신호로 서로의 삶을 바꿔 살아왔다. 새끼손가락을 걸면 잠시 서로가 되어 서로의 곤란을 견디는 방식이었다. 성인이 된 뒤 두 사람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서울의 공사에 취업한 미래, 고향에서 생계를 돕는 미지. 서로의 삶을 잘 모른 채 살아가던 어느 날, 미지는 서울에 올라왔다 미래가 직장에서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오랜만에 둘은 다시 손가락을 건다. 미래가 바닥을 치고 있는 지금, 미지가 똑같은 얼굴을 가진 ‘또 다른 나’로서 미래를 위해 잠시 미래의 삶을 대신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둘은 서로의 구멍과 상처를 하나씩 들여다보게 된다. 미래 회사에서 겪어온 고통, 미지가 육상 선수로서 좌절을 겪은 뒤 오랜 고립 생활을 했던 시절. 벌어졌던 거리만큼 서로의 바닥을 오히려 가까이서 마주하게 된다.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공식 포스터 / 영화 공식 홈페이지


 이 상상에 또 다른 상상을 얹은 영화가 있다. 바로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이다. “그때 내가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이라는 우리가 일상처럼 하는 가정이 멀티버스라는 형태로 확장된다. 세탁소를 운영하던 에블린은 세무 조사, 이혼 위기, 딸 조이와의 갈등까지 한꺼번에 몰려오는 혼란 속에서 다른 멀티버스의 남편 웨이먼드에게 이끌려 수많은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다. 세계적인 액션 배우로 살아가는 에블린, 요리사로 살아가는 에블린 등, 수천, 수만개의 다른 선택을 한 에블린들. 에블린은 그 능력을 잠시 빌려 위기에 맞서는 한편, 딸 조이는 그 모든 가능성을 한꺼번에 알아버린 탓에 허무주의에 도달해 빌런 ‘조부 투파키’가 된다.

 

 처음에는 또 다른 내가 나를 구해주는 것처럼 보인다. 미지가 회사를 대신 다녀주는 동안 미래는 잠시 숨을 돌리고, 에블린은 다른 에블린의 힘을 빌려 멋진 액션으로 적과 싸운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으며,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미지와 미래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에블린도 더 이상 에블린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는 한계가 오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그때 필요한 건 지금 여기의 나다. 이 순간에 결국 바닥에서 일어나게 하는 것은, 나를 가장 잘 아는 또 다른 나도, 쿵푸의 달인도 아닌 바로 지금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나여야만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두 작품을 좋아하는 이유는 여기부터다. 결국 나를 일으키는 것도, 그 선택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이지만, 작품은 그것을 온전히 혼자의 힘으로 그리지 않는다. 미래가 회사를 나오기 결정하기까지는 미지가 자기 삶을 온전히 살아주며 버텨준 시간이 있었다. 미지가 방을 나올 때까지는 가족들이 수없이 문을 두드리며 미지를 부르던 시간이 있었다. 에블린이 허무주의에 잠긴 딸을 껴안기까지는 다정함의 힘을 이야기하는 웨이먼드와, 베이글 속으로 떨어지지 않게 손을 잡아준 무수한 이들의 손이 있었다. 그러니까 선택은 내가 하지만, 그 선택에 도달할 수 있도록 지지해준 수많은 손과 말의 시간이 있다는 것.


 불행하게도 우리의 상상처럼 또 다른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다행히도 우리는 또 다른 나의 도움 없이도 바닥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선택을 하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미지의 서울> 속 미지의 문을 두드렸던 수많은 손과 목소리,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속 뭐가 뭔지 모를 때 마지막까지 지켜냈던 그 다정함. 그런 다양한 층위의 노력이 모여야만 나는 일어날 수 있는 온전한 힘을 갖게 된다.


 누구나, 당연히, 언젠가 삶의 바닥을 마주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계속 좌절하고 회복하기를 반복하며 살아간다. 그 순간 나를 스쳐갔던 주변의 노력을 떠올려본다. 내 삶을 지탱하게 했던 누군가의 숱한 노력들과 애틋함을 생각한다. 그리고 그 바닥에서 다시 일어난 순간,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다. 누군가의 끈질긴 두드림 덕분에 방 밖으로 나설 수 있었던 미지가 이번에는 상연 선배와 호수의 문을 두드려 먼저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오늘 내가 건네는 작은 두드림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삶을 버티는 애틋한 증표가 될지 모른다. 과거의 두드림이 오늘의 미지를 남들의 아픔을 조금 더 먼저 알아보는 사람으로 만들어준 것처럼 말이다.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르니까. 뭐가 뭔지 모를 때는 그저 다정할 수밖에.




*글쓴이 - 다솜

다솜하는 삶을 추구하며 작은 변화의 오래된 쌓임을 믿는 문화예술 기획자. 

사단법인 오늘은에서 청년의 삶과 문화예술이 만나는 지점을 탐구하고 있습니다.


* [오늘청년]은 청년들이 직접 청년 당사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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