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청년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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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청년] 찻물이 드는 시간

김아름
2026-09-15

정말이지 오늘은 글을 한 자도 쓰고 싶지 않은 날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매일, 어떤 형태로든, 어떤 언어로든, 글을 쓰는 것이 나의 일이다. ‘글’을 쓰고 ‘말’을 전달하며, 맥락 사이의 의미를 유추해 의사소통을 돕고 생각을 보다 정확하게 전하는 일, 그것이 바로 나의 직업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나 자랐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프랑스와 미국을 오가며 지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해, 11월 16일 수능을 치르고, 그해 12월 1일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는데, 낮에는 언어와 예술을 배우는 학생이었고, 이른 새벽에는 베이커로 일했다. 나중에는 베이킹을, 그리고 미국식 아카데믹 글을 쓰는 법과 프랑스어를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고, 최근까지는 제2언어 교육학을 공부하면서, 모국어가 아닌 언어를 배우며 낯선 곳에서 살아온 나 자신의 시간을 돌아보고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한국, 그리고 부산은 나의 고향이자 애증의 장소이다. 가장 편안하고 좋으면서도, 싫은 것도 유난히 많은 곳이다. 새로운 것과 여전한 것이 공존하고, 나는 그 다름을 늘 알아차린다. 빠른 속도와 편리함 이면의 갈등과 불편을 질리도록 겪어 왔고, 조금만 불쑥 불편함이 드러나면 그동안의 상처와 경험들이 돋아나 쉽게 사그라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내가 부산에 돌아와 살아가는 이유는, 다른 세상에서 새롭고 그럴싸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내가 굳이 그 사회에 속해 있어야 할 이유나 기여할 바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어디에서도 내가 평생 머물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자리는 없었다. 프랑스와 미국 사회는 동양인 여성인 나에게 친절과 호의를 베풀었고 많은 기회를 내어주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그곳은 내가 깊이 참여하고 기여하고 싶은 준거집단은 아니었다.


여행자 같은 삶을 늘 꿈꾸어 왔지만, 베이스캠프가, 돌아갈 집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잠을 줄여 가며 업무와 학업을 병행하다가 응급실에 두 차례 실려 가고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부산은 나의 베이스캠프이자 고향이며, 힘들 때 돌아와 쉬고 싶은 집이다. 파랑새를 찾아 떠났던 이들이 수많은 시련과 역경을 겪은 뒤 다시 돌아와 집 뒤뜰에서 파랑새를 발견했을 때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아쉬움과 허탈함도 있었겠지만, 많은 것을 보고 느낀 뒤에야 비로소 늘 곁에 있었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 익숙했지만 특별했던 행복을 마주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제 새로 생긴 찻집에 다녀왔다. 찻집에서 다식을 만드시는 선생님과 차와 곁들여 나온 디저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를 마시는 사람들은 찻물이 들어서인지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건네셨다. 내가 살아온 삶의 여정을 말이나 글로 드러내기도 전에, 차를 마시는 태도만으로 사람을 알아본다는 그 안목이란 무엇일까. 차를 마시는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의 결이 서로 닮아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나의 선택과 하루하루의 삶이 차곡차곡 쌓여 결국 ‘나’라는 사람을 조금씩 물들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하루의 순간순간이 모여 결국 나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부산에서 나의 하루의 마지막은 밤 10시까지 아이들과 에세이를 쓰는 일로 마무리된다. 자신이 좋아하는 주제를 아카데믹 포맷에 맞추어 영어 에세이로 쓰는 시간이다. 우리는 영어를 공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진다.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찾아보며 논지를 발전시켜 가는 과정 속에서 사실 우리는 정보나 사실보다도 나 자신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글 속에는 결국 내가 살고 싶은 삶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스며든다.



유럽의 가향차나 인도의 차들, 대만과 중국의 차들이 각기 다른 향과 맛으로 다양한 매력을 보여주지만, 한국에 와서 차를 배우며 마주한 하동 섬진다원의 차는 언제나 편안하고 다정하게 곁에 있어주는 죽마고우처럼 느껴져, 늘 가까이 두고 즐기게 된다.


차를 마시며 생각한다. 오늘 하루 숨을 깊이 들이쉬고 내쉬었는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해 질 무렵의 빛을 보고 감탄할 여유가 있었는지. 밤하늘의 어둠의 깊이를 가늠해 보고, 차오르고 비워지는 달을 바라볼 시간이 있었는지. 그렇게 내 마음도 들여다볼 수 있는 하루를 보냈는지 돌아보면 늘 아쉽다.


내가 지금 머물고 있는 이 현재, 부산에서의 삶 역시 언젠가는 지나갈 시간이다. 그래서 아쉽고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 온기는 양손 가득 따뜻하고 그윽하다.


글쓴이 - 김아름


이메일 - blue88029@gmail.com


이 글은 부산 청년을 대상으로 진행된 051 청년시그널 글쓰기 모임을 통해 작성 되었습니다. 

YCRC 를 통해 게재 되는 글 외 많은 부산 청년의 이야기는 <청년시그널-부산> (10월 중 출간 예정)을 통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오늘청년]은 청년들이 직접 청년 당사자로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하는 코너입니다.

**본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이미지 일부는 AI로 작업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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